나라현 나라시에 위치한 당초제사는 759년 나라시대의 도래승 감진(鑑真)이 창건한 일본의 불교 사원 중 하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어 있다.
감진 스님은 일본에 율종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절은 그 가르침을 계승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장대한 역사 속에서 당초제사에는 몇 가지 수수께끼와 미해결의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당초제사에 얽힌 수수께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당초제사의 수수께끼① 감진의 도래와 창건의 수수께끼』라는 주제로
당초제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는 창건자인 감진 스님의 도래이다. 감진은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여러 차례 도항을 시도했지만, 최종적으로 성공한 것은 6번째인 759년이었다. 그는 이 해에 일본에 도착해 나라 시대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감진 스님이 여섯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일본에 도착할 수 있었던 에피소드는 그의 집념과 그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감진은 중국 당나라의 고승으로, 그의 일본행은 수차례의 실패를 거쳐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이 여섯 번째 성공에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남아있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해는 위험하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감진은 여러 차례의 항해 실패와 실명이라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일본에 도착했다. 감진의 6번의 도전과 최종적인 성공은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 강한 의지와 정신력은 당초제사의 창건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감진의 집념의 배경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불교의 전파와 보급의 중요성이 있었다. 나라 시대, 일본에서는 불교가 국가 종교로 확산되고 있었지만 계율의 확립이 미흡한 상태였다. 감진은 그 계율을 확립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감진에 의해 일본 불교에 정식 계율이 확립되어 불교의 가르침이 보다 체계적으로 보급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되었다. 또한 감진의 도래 배경에는 당시 일본과 당나라의 문화 교류가 있었다. 나라 시대, 일본은 적극적으로 당나라의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였다. 감진의 내한은 그 일환으로 불교 문화의 수용과 발전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감진 스님이 왜 그토록 일본행을 강력하게 원했는지, 그 진정한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초제사의 존재는 감진의 일본에서의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감진은 계율을 중시하는 승려로 당시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감진 스님이 창건한 당초제사는 일본 불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감진의 행동에는 불교의 자비와 봉사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는 자신의 안전과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본 불교도들을 위해 계율을 전하고자 했다. 이 행동은 타인에 대한 봉사와 자비의 마음이 강하게 드러난다. 감진의 사례는 불교도가 어떻게 타인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당초제사의 수수께끼 ② 당초제사 건축의 수수께끼』편
당초제사의 건축은 오랜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자료와 중국과 일본의 건축 양식이 융합된 특이성 때문에 몇 가지 수수께끼가 남아있다.
금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천평(天平) 건축 중 하나로 나라 시대(710~794년)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정확한 건립 시기나 공법은 불분명하다. 창건 당시의 기록이 부족하여 어떤 기술과 재료가 사용되었는지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금당은 중국 사원 건축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일본의 전통 건축양식도 도입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붕은 중국식 기와집이지만 처마를 받치고 있는 구조는 일본 사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삼수조(三手組)이다. 이러한 일-양식 절충주의 건축 양식은 당시 일본과 당나라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강당은 한때 금당과 함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가마쿠라 시대에 소실되어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강당의 규모와 구조, 내부 장식 등 많은 정보가 소실된 것은 당초제사의 역사를 아는 데 큰 손실이 되고 있다.
“당초제사의 수수께끼 ③ 당초제사 금당 불상 배치의 수수께끼』당초제사 금당의 불상 배치의 수수께끼
당초제사 금당에는 몇 가지 중요한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것은 노자나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당초제사의 본존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배치와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우선 노사나불좌상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나라 시대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불상과의 배치 관계도 수수께끼에 싸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당에는 약사여래상과 천수관음상도 안치되어 있지만, 이 불상들이 어떤 의도로 배치되었는지, 또 그 순서와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또한 당초제사에는 감진화상(鑑真和上坐像)도 중요한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이 좌상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 조각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사실주의와 표현력은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감진화상의 좌상은 그가 도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생전의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좌상 제작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누가 어떻게 이 조각을 제작했는지, 그 과정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당초제사는 창건자인 감진의 도래, 사찰의 건축, 문화재의 수수께끼 등 많은 미해결 요소가 남아있다. 당초제사는 과거의 유산으로서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곳이며, 그 연구는 앞으로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